조앤 폰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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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앤 폰테인은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배우로, 1935년 연극 무대로 데뷔하여 영화, 텔레비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1940년 영화 《레베카》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1941년 《서스픽션》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40년대 멜로드라마에 주로 출연했으며, 1950년대부터는 텔레비전과 연극 무대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78년 자서전을 출판하고, 1982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94년 은퇴 후 2013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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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앤 폰테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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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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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앤 드 보부아르 드 하빌랜드 |
다른 이름 | 조앤 버필드 |
출생일 | 1917년 10월 22일 |
출생지 | 일본 도쿄 |
사망일 | 2013년 12월 15일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카멜 하이랜즈 |
국적 | 영국 미국 (1943년부터) |
학력 | 아메리칸 스쿨 인 재팬 |
직업 | 배우 |
정당 | 미국 민주당 |
활동 기간 | 1935년–1994년 |
사생활 | |
배우자 | 브라이언 아헌 (1939년-1945년, 이혼) 윌리엄 도저 (1946년-1951년, 이혼) 콜리어 영 (1952년-1961년, 이혼) 알프레드 라이트 주니어 (1964년-1969년, 이혼) |
자녀 | 2명 |
부모 | 아버지: 월터 드 하빌랜드 어머니: 릴리안 폰테인 |
친척 |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자매) 헤러워드 드 하빌랜드 (사촌) 제프리 드 하빌랜드 (사촌) |
경력 | |
주요 작품 | 레베카 (1940년) 단애 (1941년) 잊혀지지 않는 모습 (1948년) |
수상 | |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 1941년 단애 |
기타 | |
베를린 국제 영화제 | 제32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장 (1982년) |
2. 초기 생애
조앤 드 보부아르 드 하빌랜드는 1917년 10월 22일 일본 제국 도쿄 (현재 도쿄도 미나토구)에서 영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 월터 드 하빌랜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으로, 제국 대학에서 영어 교수로 재직하다 특허 변호사로 전향했다.[1] 어머니 릴리언 어거스타 루스 드 하빌랜드 폰테인은 영국 왕립 연극 학교 출신의 무대 배우였으며, 조앤과 언니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유명해진 후 "릴리언 폰테인"이라는 예명으로 활동을 재개했다.[1][2]
폰테인은 1935년 서부 해안에서 공연된 ''콜 잇 어 데이''로 무대 데뷔를 했고, MGM의 영화 ''노 모어 레이디스''(1935)로 영화 데뷔를 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조앤 버필드라는 이름으로 출연했다.[9] 이후 저예산 독립 영화 ''어 밀리언 투 원''(1937)에서 브루스 베넷(허먼 브릭스라는 이름으로 출연)의 상대역을 맡았다.[10]
드 하빌랜드의 부모는 1914년에 결혼하여 1919년에 별거했으며, 1925년 2월에 이혼했다.[6] 릴리언 드 하빌랜드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홍역과 연쇄상구균 감염의 합병증으로 빈혈을 앓던 조앤과 언니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했다.[7][6] 가족은 캘리포니아주 새러토가에 정착했고, 폰테인은 로스 가토스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6세 때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가 도쿄 외국인 학교를 1935년에 졸업했다.[8]
3. 배우 경력
폰테인의 운은 어느 날 저녁 만찬에서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 옆에 앉게 되면서 바뀌었다. 셀즈닉과 폰테인은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셀즈닉은 그녀에게 이름 없는 여주인공 역을 오디션 볼 것을 요청했다. 그녀는 22번째 생일 즈음 배역을 따내기 전까지 수백 명의 다른 여배우들과 함께 6개월 동안 영화 테스트를 거쳤다.
로렌스 올리비에와 폰테인이 함께 출연한 영화 ''레베카''(1940)는 영국 출신 감독 앨프레드 히치콕의 미국 데뷔작이었다. 이 영화는 호평을 받으며 개봉되었고, 폰테인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10] 그 해에는 진저 로저스가 ''키티 포일''로 수상했지만, 다음 해 폰테인은 히치콕 감독의 ''의혹''에서 캐리 그랜트와 공연하여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10] 이 영화는 히치콕 감독 작품 중 유일한 아카데미 연기상 수상작이다.[14]
폰테인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가장 큰 여성 스타 중 한 명이었지만, 여성 멜로드라마에서 전형적인 역할로 고정되었다. 1940년대 최고의 여성 스타중 한명으로,[24] 20세기 폭스는 그녀를 빌려 타이론 파워와 함께 ''무지개 위에''(1942)에 출연시켰고, 그 후 그녀는 워너 브라더스로 가서 찰스 보이에와 함께 ''불멸의 님프''에 출연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의 연기로 세 번째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15][16] 또한 그 해 셀즈닉이 제작하여 폭스에 판매된 영화 ''제인 에어''에서 주연을 맡았다.
폰테인은 전쟁 동안 가끔 간호 보조원으로 일했다.[17]
폰테인은 영화 ''프렌치맨즈 크릭''(1944)에 출연했다. ''레베카''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폰테인은 개인적으로 ''프렌치맨즈 크릭''을 자신이 출연한 영화 중 가장 싫어하는 영화 중 하나로 여겼다.
셀즈닉은 그녀를 ''아이'll 비 씨잉 유''(1944)에 캐스팅하고 싶어했지만, 그녀는 "슬픈 배역은 지겹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셀즈닉은 그녀를 8개월 동안 정직시켰다.[18] 결국 그녀는 파라마운트에서 할 윌리스를 위해 ''수잔의 사생활''(1945)로 복귀했고, 이것이 그녀의 첫 번째 코미디였다. 그녀는 RKO로 돌아와 ''오늘부터''(1946)에 출연했다.
1940년대 폰테인은 라디오 장수 프로그램 《Lux Radio Theatre》에 여러 번 출연했다. 1950년대가 되면서 영화에서의 인기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배우로서의 활동 무대를 텔레비전과 무대로 옮겨갔다. 1954년에 상연된 연극 작품 《티 앤드 심퍼시》에서 앤서니 퍼킨스의 상대역인 로라를 연기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60년대 이후 폰테인의 활동은 대부분 텔레비전이나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연극과 텔레비전 드라마에 계속 출연했으며, 1980년에는 드라마 라이언의 희망으로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3. 1. 초기 (1935-1939)
폰테인은 RKO 픽처스와 계약을 맺었다. 1935년에 상연된 Call It a Day영어라는 희곡으로 배우 데뷔를 하였다. 영화 첫 출연은 1935년 《남자 견제》의 단역이었으며, 당시 폰테인은 조안 바필드라는 이름으로 크레딧에 올랐다[76]。
당시 폰테인과 계약했던 RKO는 캐서린 헵번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고, 폰테인에게는 《A Million to One영어》(1937년)이나 《가짜 여자》(1937년)와 같은 작품의 단역밖에 배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RKO는 폰테인을 장래가 촉망되는 배우라고 생각하여 《The Man Who Found Himself영어》의 히로인으로 발탁했고, "RKO의 새로운 여배우"라고 엔드 크레딧에 소개했다[77]。
그녀는 캐서린 헵번 주연의 ''퀄리티 스트리트''(1937)에 작은 배역으로 출연했다. 스튜디오는 그녀를 떠오르는 스타로 여기고, 존 빌과 함께한 ''자기 자신을 발견한 남자''(1937)를 그녀의 첫 주연작으로 내세우며, 영화 크레딧이 끝난 후 "새로운 RKO의 스크린 인물"이라는 특별한 소개를 넣었다.[11] 폰테인은 나중에 이 영화에 대해 "A급 예산에 Z급 스토리"라고 말했다.[12]
RKO는 그녀를 프레스턴 포스터와 함께한 ''유 캔트 비트 러브''(1937)와 니노 마티니와 함께한 ''마담을 위한 음악''(1937)에 출연시켰다.
폰테인이 다음에 주역급을 연기한 것은, 그전까지 진저 로저스와 함께 출연하여 성공을 거둔 프레드 아스테어가 로저스와 헤어져 RKO 작품에 처음 출연한 《디스트레스의 아가씨》(1937년)였다. 조지 스티븐스가 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실망했고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13] 그녀는 코미디 영화 ''메이드스 나이트 아웃''과 ''금발 사기꾼''에서 톱으로 이름을 올렸고, 이어서 리처드 딕스의 상대역으로 ''스카이 자이언트''(모두 1938년)에 출연했다.
에드워드 스몰은 그녀를 빌려 루이스 헤이워드의 연인 역으로 ''웨스트 포인트의 공작''(1938)에 출연시켰고, 스티븐스는 RKO에서 그녀를 사용하여 ''군가 딘''(1939)에서 더글러스 페어뱅스 주니어의 연인 역할을 맡겼다.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폰테인의 역할은 비교적 작았다. 리퍼블릭 픽처스는 그녀를 빌려 딕스를 지원하는 ''정복자''(1939)에 출연시켰지만 그녀의 역할은 작았다. 조지 큐커는 그녀에게 MGM의 ''여인들''(1939)에서 작은 역할을 주었다.[10][12] 그 후 폰테인은 《더 위민》 등 12편의 작품에서 단역을 계속 연기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RKO와의 계약은 갱신되지 않은 채 1939년에 종료되었다.
3. 2. 데이비드 O. 셀즈닉 & 앨프리드 히치콕 (1940-1946)
데이비드 O. 셀즈닉과 저녁 식사를 하던 중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셀즈닉은 폰테인에게 여주인공 역 오디션을 제안했다. 폰테인은 6개월 동안의 오디션을 거쳐 22번째 생일 직전에 배역을 따냈다.
로렌스 올리비에와 함께 출연한 영화 ''레베카''(1940)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미국 데뷔작이었다. 영화는 호평을 받았고, 폰테인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10] 그 해에는 진저 로저스가 ''키티 포일''로 수상했지만, 다음 해 폰테인은 히치콕 감독의 ''의혹''에서 캐리 그랜트와 공연하여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10] 이 영화는 히치콕 감독 작품 중 유일한 아카데미 연기상 수상작이다.[14]
20세기 폭스는 그녀를 빌려 타이론 파워와 ''무지개 위에''(1942)에 출연시켰고, 이후 워너 브라더스에서 찰스 보이에와 ''불멸의 님프''에 출연했다. 폰테인은 이 영화로 세 번째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15][16] 같은 해 셀즈닉이 제작하고 폭스에 판매된 영화 ''제인 에어''에서 주연을 맡았다.
폰테인은 ''프렌치맨즈 크릭''(1944)에 출연했다. ''레베카''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폰테인은 개인적으로 ''프렌치맨즈 크릭''을 자신이 출연한 영화 중 가장 싫어하는 영화 중 하나로 꼽았다.
셀즈닉은 그녀를 ''아이'll 비 씨잉 유''(1944)에 캐스팅하고 싶었지만, 폰테인은 "슬픈 배역은 지겹다"며 거절했고, 셀즈닉은 그녀를 8개월 동안 정직시켰다.[18] 결국 그녀는 파라마운트에서 ''수잔의 사생활''(1945)로 복귀했고, RKO에서 ''오늘부터''(1946)에 출연했다.
3. 3. 램파트 프로덕션 설립 및 이후 (1947-1960년대)
아이다 루피노가 감독한 영화 ''거짓 부부''(1953)에 출연했다. 이후 ''포 스타 플레이하우스'', ''포드 극장'', ''스타 스테이지'', ''20세기 폭스 아워'', ''조셉 코튼 쇼'', ''제너럴 일렉트릭 극장''과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기 시작했다.
1954년 브로드웨이에서 데보라 카가 연기한 로라 역을 맡아 ''차와 동정심''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 앤서니 퍼킨스와 함께 공연했고 몇 달 동안 순회 공연을 했다.[22]
밥 호프의 상대역으로 ''카사노바의 빅 나이트''에 출연했고, 1956년에는 마리오 란차의 ''세레나데''에 출연했다. 같은 해 RKO에서 프리츠 랑의 ''합리적인 의심''에도 출연했다.
1957년 해리 벨라폰테와 로맨스를 펼치는 ''아일랜드 인 더 선''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MGM에서 진 시몬스, 폴 뉴먼과 함께 ''그들이 항해할 때까지''(1957)에 출연했고, 이후 폭스에서 ''어떤 미소''(1958)를 제작했다.
1961년, 폭스에서 제작한 인기 영화 ''해저 여행''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또한 폭스에서 제작된 ''밤은 부드러워''(1962)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0년대 그녀의 활동은 대부분 텔레비전이나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제너럴 일렉트릭 극장'', ''웨스팅하우스 데실 플레이하우스'', ''스타임'', ''알코아 프레젠트: 원 스텝 비욘드'', ''체크메이트'', ''딕 파웰 쇼'', ''크라프트 텔레비전 극장'', ''웨건 트레인'', ''알프레드 히치콕 Presents'', ''빙 크로스비 쇼'' 등에 출연했다.
1964년 10월, 브로드웨이로 돌아와 ''잘린 머리''에 출연했다.[23]
1966년 해머 호러 영화 ''마녀들''에 출연했으며, 공동 제작도 했다.
무대 작품으로는 ''선인장 꽃''과 오스트리아에서 제작된 ''겨울의 라이온''이 있다.
1967년, 시카고에서 ''다이얼 M을 돌려라''에 출연했다.[24] 이듬해 ''사생활''에 출연했다.[25]
브로드웨이에서 ''40캐럿''을 공연했다.
3. 4. 후기 경력 (1960년대-1994)
1960년대에 폰테인은 주로 텔레비전과 무대에서 활동했다. 출연한 TV 프로그램으로는 제너럴 일렉트릭 극장, 웨스팅하우스 데실 플레이하우스, 스타임, 알코아 프레젠트: 원 스텝 비욘드, 체크메이트, 딕 파웰 쇼, 크라프트 텔레비전 극장, 웨건 트레인, 알프레드 히치콕 Presents, 빙 크로스비 쇼 등이 있다.[23] 1964년 10월에는 브로드웨이로 돌아와 ''잘린 머리''에 출연했다.[23]
폰테인은 해머 호러 영화 마녀들(1966)에 출연하고 공동 제작도 했다.[24] 무대 작품으로는 선인장 꽃, 오스트리아에서 제작된 겨울의 라이온 등이 있다. 1967년 시카고에서 다이얼 M을 돌려라에 출연했고,[24] 이듬해에는 사생활에 출연했다.[25] 브로드웨이에서 ''40캐럿''을 공연하기도 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폰테인은 연극과 텔레비전 드라마에 계속 출연했으며, 1980년에는 드라마 라이언의 희망으로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1978년에는 자서전 No Bed of Roses|노 베드 오브 로지즈영어를 출판했다. 1982년에는 제32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았다.[78]
1994년 TV 영화 Good King Wenceslas|굿 킹 벤체슬라스영어를 마지막으로 연예계에서 은퇴하고, 캘리포니아주 카멜 바이 더 씨의 저택에서 정원 가꾸기와 애완견과 함께 생활했다.[79]
4. 사생활
조앤 폰테인은 네 번 결혼하고 이혼했다. 1939년 배우 브라이언 아헌과 처음 결혼했으나[41] 1945년에 이혼했다.[42] 1946년에는 배우 겸 프로듀서인 윌리엄 도지어와 재혼하여[43] 1948년에 딸 데보라 레슬리를 낳았지만, 1949년에 별거에 들어갔고 1951년에 이혼했다.[44]
1952년에는 프로듀서 콜리어 영과 세 번째 결혼을 했으나[47] 1960년에 별거,[48] 1961년에 이혼했다. 1964년에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골프 편집장 알프레드 라이트 주니어와 네 번째 결혼을 했지만[49] 1969년에 이혼했다.
1951년, 폰테인은 영화제 참석차 남아메리카를 방문했을 때 네 살 된 페루 소녀 마르티타를 만나 비공식적으로 입양했다.[52] 잉카 제국 유적지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던 마르티타의 아버지를 만났고, 마르티타의 부모는 딸에게 더 나은 삶을 주기 위해 폰테인이 법적 보호자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52] 폰테인은 마르티타가 16세가 되면 페루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지만, 마르티타는 귀국을 거부하고 가출하여 폰테인과 소원해졌다.[54]
폰테인은 언니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자매는 모두 1942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는데, 폰테인이 앨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서스피션''으로 상을 받았다.[35] 폰테인은 언니보다 먼저 결혼하고 오스카상을 받았다고 언급하며, 언니와의 경쟁 심리를 드러내기도 했다.[38]
폰테인은 자신의 딸들과도 소원한 관계를 가졌는데, 전기 작가 찰스 하이엄은 딸들이 비밀리에 드 하빌랜드와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34]
5. 일본과의 관계
조앤 폰테인은 1917년 도쿄부 도쿄 (현재 도쿄도 미나토구)에서 영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가 세이신 인터내셔널 스쿨에 입학하여 1935년에 졸업했다.[8]
세이신 인터내셔널 스쿨 재학 시절 요코하마시에 살던 동급생 엘레노어 차일드와 친하게 지냈으며, 주말에는 엘레노어의 부모가 소유한 하야마정 해변 별장에 자주 초대받았다.[82][71] 같은 시기 요코하마에 살던 알 닙코우와 교제하기도 했으나, 일본을 떠나면서 관계는 끝났지만 평생 친구로 남았다.[71] 이 외에도 조지프 그루 미국 대사, 알베르 드 바송피에르 벨기에 대사 등과 교류하였다.[71]
1962년 재팬 아메리칸 스쿨의 지원으로 일본을 다시 방문하여 옛 동급생들과 담소를 나누고, 에드윈 O. 라이샤워 미국 대사와 춤을 추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71]
6. 사망
조앤 폰테인은 2013년 12월 15일, 캘리포니아주 카멜 하이랜드 자택에서 잠자던 중 노환으로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5] 그녀의 오랜 친구 노엘 보텔은 "그녀는 최근 며칠 동안 쇠약해졌고 평화롭게 죽었다"라고 말했다.[55] 폰테인의 사망 후,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충격적이고 슬프다는 성명을 발표했다.[56]
7. 출연 작품
조앤 폰테인은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였다.
연도 | 제목 | 배역 | 비고 |
---|---|---|---|
1935 | 노 모어 레이디스 | 캐롤라인 "캐리" 럼지 | 조안 버필드(Joan Burfield)로 출연[9] |
1937 | 어 밀리언 투 원 | 조안 스티븐스 | |
1937 | 퀄리티 스트리트 | 샬롯 패럿 | 크레딧 없음 |
1937 | 자신을 발견한 남자 | 너스 도리스 킹 | |
1937 | 유 캔트 비트 러브 | 트루디 올슨 | |
1937 | 마담을 위한 음악 | 진 클레멘스 | |
1937 | 아름다운 아가씨 | 레이디 앨리스 마시모턴 | |
1938 | 메이드스 나이트 아웃 | 쉴라 해리슨 | |
1938 | 금발 사기꾼 | 줄리엣 "줄리" 에반스 | |
1938 | 스카이 자이언트 | 메그 로렌스 | |
1938 | 웨스트 포인트의 공작 | 앤 포터 | |
1939 | 군가 딘 | 에미 | |
1939 | 정복의 남자 | 엘리자 앨런 | |
1939 | 여자들 | 존 데이 부인 (페기) | |
1940 | 레베카 | 두 번째 드 윈터 부인 |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여우주연상 후보 |
1941 | 서스픽션 | 리나 |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여우주연상 |
1942 | 이것이 전부다 | 프로던스 캐서웨이 | |
1943 | 콘스탄트 님프 | 테사 생거 |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 |
1943 | 제인 에어 | 제인 에어(성인) | |
1944 | 프렌치맨스 크릭 | 도나 세인트 콜럼 | |
1945 | 수잔의 사건 | 수잔 다렐 | |
1946 | 오늘부터 | 수잔 커밍스 | |
1947 | 아이비 | 아이비 | |
1948 | 어느 여인의 편지 | 리사 베른들 | |
1948 | 황제의 왈츠 | 요한나 아우구스타 프란치스카 백작 부인 | |
1948 | 유 가타 스테이 해피 | 디디 딜우드 | |
1948 | 내 손에 피를 묻히지 마 | 제인 와튼 | |
1950 | 9월의 정사 | 마리안 "마니나" 스튜어트 | |
1950 | 나쁜 여자로 태어나다 | 크리스태벨 케인 캐리 | |
1951 | 달링,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 앨리스 그레이 | |
1951 | 오셀로 | 페이지 | 크레딧 없음 |
1952 | 살아갈 무언가 | 제니 캐리 | |
1952 | 아이반호 | 로웨나 | |
1953 | 데카메론의 밤 | 피아메타/바르톨로메아/지네브라/이사벨라 | |
1953 | 탱어의 비행 | 수잔 레인 | |
1953 | 결혼 사기꾼 | 이브 그레이엄 | |
1954 | 카사노바의 빅 나이트 | 프란체스카 브루니 | |
1956 | 세레나데 | 켄달 헤일 | |
1956 | 합리적인 의심 너머 | 수잔 스펜서 | |
1957 | 아일랜드 인 더 선 | 메비스 노먼 | |
1957 | 그들이 항해할 때까지 | 앤 레슬리 | |
1958 | 어떤 미소 | 프랑수아즈 페란드 | |
1958 | 사우스 비치 | 폴리네시아 여성 | |
1961 | 실패한 빛 | 호스티스 | TV 영화 |
1961 | 심해로의 항해 | 수잔 힐러 박사 | |
1962 | 밤은 부드러워 | 베이비 워렌 | |
1966 | 마녀들 | 그웬 메이필드 | |
1978 | 사용자들 | 그레이스 세인트 조지 | TV 영화 |
1986 | 어두운 저택들 | 마가렛 드레이크 | TV 영화 |
1994 | 착한 바츨라프 왕 | 루드밀라 여왕 | TV 영화 |
7. 1. 영화
원제No More Ladies
Quality Street
A Damsel in Distress
Sky Giant
Gunga Din
The Women
Rebecca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
Suspicion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여우주연상
This Above All
The Constant Nymph
Jane Eyre
'Frenchman Creek
The Affairs of Susan
From This Day Forward
Ivy
Letter from an Unknown Woman
The Emperor Waltz
You Gotta Stay Happy
Kiss the Blood Off My Hands
September Affair
Born to Be Bad
Something to Live For
Othello
Ivanhoe
Decameron Nights
Flight to Tangier
The Bigamist
'Casanova Big Night
Serenade
Beyond a Reasonable Doubt
Island in the Sun
A Certain Smile
Voyage to the Bottom of the Sea
Tender Is the Night
The Witches